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중 최고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은 지난해 신입생 선발과정에서 SAT(대학수학능력시험) 만점자중 절반 가량을 낙방시켰다.

수능시험이 당락을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같은 차이점의 근본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 뉴 헤이븐에 위치한 명문 예일대학

미국 대학의 신입생 선발에 있어 궁극적인 목표가 '대학의 명성을 빛내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는 학생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기여는 성적순이 아니다'는 보편적인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열정과 성실성을 갖고 있는지, 봉사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등 성적 이외의 요인들을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이 강조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반영되는 요인과 비중도 대학의 인재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SAT를 만점받고도 낙방한 학생들이 대학의 결정에 이의를 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 SAT가 합격의 절대 요건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A대학에는 붙었는데, B대학에는 떨어지는 사례가 허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들이라고 미국의 대학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리는 없다. 하지만 성적으로만 신입생을 뽑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대학 입학=성적순'이라는 일차원적인 대학 서열화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뉴저지 주립대학인 럿거스(Rutgers) 입학처의 낸시 풀렌은 "입학처의 임무는 졸업후 사회에 나가 대학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신입생을 뽑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말 예일대학 조기전형에 당당히 합격한 박상현군의 아버지인 박재순씨는 "미국 대학들은 대학과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확한 선발 기준을 갖고 있다"며 "다양한 재능과 성별, 인종의 학생들이 서로 어울려 대학사회를 구성하는 멜팅포트(meltingpot)를 만들어야 사회적 발전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성적은 기본..'성실성과 사회성' 핵심 요인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 신입생의 SAT 성적은 매우 높다.

예일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SAT 수리영역의 경우 합격자중 상위 25%의 성적이 800점 만점에 790점이고, 하위 25%의 성적은 700점이었다. 평균은 740점. 운동특기생이나 동문자녀로 '레가시(기여입학)' 혜택을 받은 신입생을 제외하면 700점 정도는 돼야 예일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록 800점 만점을 맞았다고 합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학업 성적이 떨어져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공부만 잘해선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들이 요구하는 뛰어난 성적은 그야말로 기본인 셈이다.

그 보다 중요한 요인은 사회성과 성실성이다. 리더십 및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등을 판단해 대학발전과 사회기여에 적합한 신입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그 척도로는 음악 운동 등 특기, 과외활동, 봉사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남다른 특기가 있으면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 우대를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히 벼락치기식 과외활동은 미국 대학에 통하지 않는다. 얼마나 꾸준하게 자신의 사회성을 키우는데 열정을 갖고 있었느냐를 주요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다.

교수진, 도서관, 운동시설 등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학생인가도 선발의 중요 고려사항이다. 자원 활용도를 높여야 대학과 학생이 윈윈할 수 있다는 미국 대학의 실용주의적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획일적인 고교등급제는 없다' vs '미국판 연좌제(?)'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고교등급제는 미국 대학입학과정에서 어떻게 적용될까.

▲ 하버드대학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

결론부터 말하면 고교의 수준을 면밀히 파악해 입학사정에 고려하지만 획일적인 고교등급제는 없다. 예를 들어 동부 사립 명문고교에서 받은 B등급은 여느 고등학교의 A등급에 뒤지지 않는다.
 
반면 다양한 교육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게 주어지는 시골 고교 출신 학생의 SAT 점수가 동부 사립 명문고교 출신과 같다면 시골 고교 출신에게 가산점을 준다. 지원자를 중심에 두고 주어진 여건에서 얼마나 성실히 공부했는가를 따질 때 고교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교의 서열화는 아니다.

한편 미국 대학은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고를 친 학생의 출신 고교에 대해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주는 불문률을 갖고 있다. 공개적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학입학과정에서 이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는 것. 해당 고교의 교육이 전인적인 인재를 길러내는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4년 전인 2004년 뉴저지주 영재 과학고인 버겐 아카데미의 학생이 하버드대학에 합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터뷰 과정에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책을 출간한다고 밝혀 후한 점수를 받았는데,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 하버드대학은 그 이후 4년동안 버겐 아카데미 출신의 신입생을 한명도 뽑지 않았다.

◇불공평을 통한 발전 '기여입학제'

미국 대학입학제도의 특징중 하나는 동문자녀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는 레가시(regacy)다. 주로 기부금 형태로 이뤄지는 이같은 입학제도는 계층간 교육 불평등을 고착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미국 대학 발전의 원동력중 하나인 것도 분명하다.
 
기여입학과 동문들의 기부금 등을 통해 쌓인 막대한 규모의 재원은 소외계층 출신의 인재를 뽑아 등록금 등을 지원하고 세계 최고의 교육환경을 마련하는데 투자된다. 미국 명문대학은 이미 '기부금→최고의 교육 환경 마련→인재 배출→기부금 확대'라는 선순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미국 명문 대학들은 엄청난 규모의 기부금 펀드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 하버드 대학을 시작으로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집안 사정에 따라 등록금을 대폭 감면해 저소득층의 입학 문턱을 대폭 낮출수 있었던 것도 막대한 기부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 명문대학 대부분은 레가시 입학 비율을 공개하고 있지 않다. 학교마다 편차가 심한 편이지만 신입생의 평균 15% 정도가 레가시를 통해 입학하고, 특히 조기전형에서 비율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추정이다.

미국 명문대학의 기여입학 논란은 미국 사회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업성적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논란의 소지를 최소화하고 있다. 돈만 있다고 기여입학이 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예일대 입학처장인 제프리 브렌젤은 "예일대의 레가시 학생비율이 15%로 입학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질 또한 뛰어나다"며 "실제로 레가시 입학생들의 평균 시험 성적은 예일대 전체 학생 평균을 웃돈다"고 강조했다.

예일대 조기전형에 합격한 박상현군은 "레가시가 없는 학생들은 모두 레가시 제도를 싫어하지만 기부된 돈으로 교육 시설도 짓고,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는 등 불공평한 제도가 있음으로써 대학이 발전하는 구조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석희 세인트 존스대학 교수는 "한국의 경우 지금과 같은 평준화 교육 제도 아래에서는 기여입학제가 큰 문제가 되겠지만 교육의 다양화 개성화 특성화가 충족되는 시점에서는 한국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이데일리 김기성특파원]